2009년 06월 28일
에밀 졸라에 꽂히다
아무런 생각없이 충동적으로 책세상문고에서 낸 <나는 고발한다>를 샀다. 제목만으로는 너무나 잘 알려진, 그래서 마치 나만 빼고 다 알고 있는듯한 에밀 졸라의 글들을 번역한 책이다. "1894년부터 1906년까지 12년에 걸쳐 프랑스 국민을 좌우대결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드레퓌스 사건의 와중에 에밀 졸라가 쓴 글 11편을 번역했다.
(에밀 졸라에 무지했던 나도 놀랐던 것은 이제까지 이 글들을 한글로 번역한 책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유기환 교수는 "<나는 고발한다>가 발표된 지 107년 만의 (첫) 번역이라는 사실만 봐도 한국 프랑스학 연구의 얇은 두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했다.
유기환 교수를 언급한 김에, 이 책의 장점은 유기환 교수의 (혹은 책세상 문고의) 매끄러운 번역 솜씨에도 '충분히'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에밀 졸라의 화려한 글은, 자칫하면 딱딱한 한자투성이의 난해한 글로도 번역될 위험이 다분한 것 같은데, 이 책은 매우 아름다운 문체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단지 이분의 번역이 좋아서 <실험소설>도 샀다.)
이 책이 재미있는 까닭은 단지, 그리고 안타깝게도 현실과의 유사성이다. 가령,
"진실에 목말라 하는 것, 그것은 유죄이다. 정의를 갈구하는 것, 그것은 유죄이다. 잔혹한 독재정치가 부활했고 가장 무거운 재갈이 입에 채워졌다. 공공의 양심을 짓밟고 있는 것은 시저의 군화가 아니다. 정의와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의회이다. 말하지 말 것! 주먹이 진실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입을 강타하고 있다"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가운데 일부.)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알고 에밀 졸라는 분노한다. 군사법정은 처음엔 '무지'로 인해 독일의 스파이로 몰린 한 유태인 장교에게 '악마섬'에의 유배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가 진범이 아님을 아는 이들이 늘어나고, '진범'과 그를 뒷받침하는 명확한 '증거'들이 나타나지만 군사법정은 요지부동이다. 많은 증거들이 드러나는 상태에서 2심이 열리지만 이미 '보불전쟁'의 상흔이 짙었던 프랑스 사회에는 '반유태주의'와 '국가주의'가 판을 친다. 군 지휘부가 '오류'를 인정하기 꺼려하는 가운데 '드레퓌스'를 배신자로 단정하는 대중적 광기가 넘친다.
나는 오늘날 한국에서 보이는 것처럼 민주사회에서 정의가 무너지는 가장 결정적인 시점은 바로 '사법부'의 붕괴라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진실'에는 관심이 없는 행정부와 여론을 주조하고, 호도하는 언론과 대중의 광기가 '드레퓌스 사건'의 주요 뼈대이지만 사법부가 통치, 그 자체를 위한 수단이 될 때, 자기 오류를 인정하지 않을 때, 정의와 진실 외에 다른 가치를 앞세울 때 사회의 심장은 멎는다.
"모름지기 위대한 나라는 정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지고한 사법에 대한 모욕, 시민의 인권에 대한 부정이 보란듯 너무도 오만하고 너무도 뻔뻔하게 저질러졌기에, 우리는 이웃의 눈이 두려워 재앙에 대해 함구하고 남몰래 시체를 매장하려 해도 그렇게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전 세계가 보았고 전 세계가 들었습니다.('알프레드 드레뷔스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일부)"
지금 한국에서도 지고한 사법에 대한 모욕, 시민의 인권에 대한 부정이 보란듯 너무나 오만하고 뻔뻔하게 저질러 지고 있다. 심지어 국제사회에서는 '미친 탄압병'이라는 공개적인 조롱이 나오고 있음에도 정부엔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한 뻔뻔스러움의 중심엔 한국의 '정의'를 사수해야 할, 한국의 '양심' 그 자체가 되어야할 검찰과 사법부의 '자살'이 있다.
프랑스가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너무나 창피한 사건에도 오늘의 명예를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단지 에밀 졸라가 있기 때문이다. 에밀 졸라도 일찍이 이러한 미래를 자신했다.
"상원과 하원, 문민 권력, 군부 권력, 거대 신문, 거대 신문이 중독시킨 여론 등 모든 것이 저에게 적대적입니다. 제 편으로는 오직 하나의 관념, 즉 진실과 정의의 이사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은 너무나 평온합니다. 저는 승리할 것입니다.
저는 정녕 우리나라가 거짓과 불의 속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오늘 여기서 저는 유죄 선고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프랑스가 자신의 명예를 구해준 데 대해 제게 감사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배심원들을 향한 최후 진술)
그렇다면 오늘의 부끄러운 한국에선 누가 최후의 양심이 될 것인가? 내 생각에도 오늘날의 한국보다 100여 년 전의 프랑스가 더 나은 점은 바로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가 1898넌 1월 13일 <로로르>에 발표됐을 때 광기에 휩싸여 있던 여론이 거대한 회귀를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한 명의 지식인이 진실을 외쳤을 때 그를 들을 대중의 귀가 있다면 그 사회는 살아날 가망이 있다.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문제에서 말인데, '나는 고발한다'라는 섹시한 제목은 에밀 졸라 자신이 아닌 이 신문의 편집자가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 선정적 제목과 평이한 제목의 극단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의미심장한 '역할론'을 보여주는 듯)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는 왜 온갖 충격적인 사건과 명문장의 고발, 오만가지 비상식이 난무하는데도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모두가 걱정했던 것처럼 지난해 '비상식'에 맞서 촛불을 들고 분연히 일어났던 대중은 깨지지 않은 '철벽' 앞에서 다시 주저앉아 일어나지 않는다. 혹시 진실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질 지식인이 없어서인가?
"글쓰기를 통한 진실과 정의의 역사 창조는 졸라에게 실로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사람들은 그가 투쟁을 통해 자기 선전을 하고 있고 또한 유태인 조직으로부터 돈을 받고 있다고 모략했다. 덕분에 그가 10년 전부터 공들여온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피선은 물 건너간 일이 되었다. 경제적 손실 역시 사회적 손실 못지 않게 컸다. 재판 비용, 작품 판매 부수의 격감, 망명생활, 집필 시간의 부족 등은 그를 문자 그대로 파산 상태로 몰고 갔다. 어쩌면 의문의 가스 중독사는 그가 치른 마지막 대가일지도 모른다. 졸라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고발이란 폭력이 아니라, 희생이다.(유기환 교수의 해제 중)"
에밀 졸라는 집에서 가스 중독으로 사망한다. '사고사'로 볼 수도 있지만 최근 여러 정황을 통해 그가 '살해' 당했을 가능성도 높게 쳐진다. 그의 죽음은 진실이 모두 밝혀진 이후였다. 물론 정부는 진범을 처벌하지도 드레퓌스와 지식인들에게 사과하지도 않고 '처벌 후 사면'이라는 매우 정치적인 선택만을 했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드레퓌스가 복권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이 저질렀거나, 허위를 뿌리채 뒤흔든 지식인에 대한 권력의 보복이었으리라.
나는 이 짧은 문고판 책을 읽고 '드레퓌스 사건'에 큰 흥미를 느꼈다. 특히 유기환 교수가 해제에서
"드레퓌스 사건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벌어진 봉건 보수 세력과 공화 진보 세력의 마지막 대혈투라고 할 수 있다. 드레퓌스 사건의 주범은 몇몇 군인이 아니라 보수적인 시대 분위기였다. 즉 1870년 보불전쟁에서 패한 후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공포는 국민들로 하여금 군대라는 '수단'을 국가 안보라는 '목적'과 혼동하게 했고, 이 혼동의 불길에서 보수파가 반유태주의와 내셔널리즘이라는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어쩌면 프랑스가 근대 반봉건 사회에서 현대 민주주의 사회로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할 통과의례였을지도 모른다"
라고 해설한 부분에서 특히 그렇다. 대학시절 '외교사' 수업에서 이 시대를 매우 헤매이며 들었지만,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상상을 못했다. 특히 이 사건이 "유태인의 정체성 확립과 이스라엘 건국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도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유태인들은 그 어느나라보다 앞장서서 자신들에게 사법적·공민적 권리를 보장했던 프랑스가 반유태주의의 물결에 휩쓸리는 것을 보고 전율적 공포를 느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나는 유기환 교수가 '더 읽어야할 자료'에서 소개한 니콜라스 할라즈의 <나는 고발한다 : 드레퓌스 사건과 에밀졸라> (황의방 옮김 한길사1998) 나 아르망 이스라엘의 <다시 읽는 드레퓌스 사건> (이은진 옮김, 자인2002)를 바로 구매하려 했지만 둘다 품절이다. 게다가 두번째 책은 이 출판사 자체가 없어진 것 같다.
출판사에도 전화해볼 생각이지만 혹시 중고라도 팔 사람이 있으면 '정가'로 살 의지가 있다. (두번째 책은 25000원짜리다. 그 두께를 짐작할만하다) 혹시 서가에 이 책을 꽂아두고 보지 않는 블로거가 있다면 나에게 팔아주셨으면 땡큐베리감사하겠다. ㅠㅠ
# by | 2009/06/28 23:32 | Magical Realism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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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님 니가 읽고 싶은 책을 찾기 위해 서울의 헌책방 순례에 나선다면 동참하고 싶소 ㅋㅋ